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5:4)
우리의 상식으로 보면 애통은 결코 행복의 조건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이것이 영원한 진리가 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얼른 보기에 이것은 역설적으로 들립니다. 그러나 예수의 교훈을 이해하는 비결은 애통이라고 하는 단어의 뜻에 있습니다. 이 단어는 슬픔과 비탄의 외적 표현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것을 의미하는 단어가 희랍어에 있습니다. 그러나 애통이라고 하는 것은 관심 즉 고린도전서 5장 2절에 쓰여진 것과 같이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한 관심을 나타냅니다.
본문에서 예수는 한 식구가 죽어버린 데서 오는 슬픔이나 비탄 따위를 말씀하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그는 부모가 그의 자식에 대하여 가지는 것과 같은 사랑으로 가득한 관심을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부모들이 자식으로 하여금 행복하고 어른다운 생활을 하도록 돌봐주는 염려를 의미합니다. 그는 부모가 자식의 필요와 실패에 대하여 민감하게 만드는 따위의 사랑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예수가 제물이 많은 청년 율법사에게 베푸셨던 사랑입니다.(마19:16-22) 아버지와 같이 그는 이 청년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개발해 내지 못하는 가능성을 보셨습니다. 우리가 진정한 행복을 갖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에 대하여 이러한 사랑을 베풀 수가 있어야 합니다.
청소년교육 지도자들은 젊은 세대가 타락하는 이유로서 부모들의 동정과 이해가 모자란다고 지적합니다. 그들의 배후에는 자기를 보살펴 주는 보호자가 없는 것이 대부분 이었습니다. 그들의 타락을 애통하는 사람이 없으므로 그들은 비정상적이고 불행한 생활을 가져오게 됩니다.
사람은 선천적으로 자기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도록 만들어진 사회적 동물입니다. 많은 심리학자들은 인간이 선천적으로 남을 동정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진 존재라고 주장합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세상에는 왜 그와 같이 무정한 사람들이 많이 있을까요? 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필요에 대하여 그와 같이 무관심 할 수가 있을까요? 그것은 타인에 대해서 갖는 고상한 관심이 억눌려 있기 때문입니다.
남자들 가운데는 특히 '그는 사나이다' 하는 식의 태도를 갖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린이가 말을 배우게 될 때에 그는 '아이야 울지마라' 고 하는 말을 듣게 됩니다. 그가 타인에 대하여 가지는 본능적인 관심을 개발하고 증대시키도록 가르침을 받아야 할 어린 시절에 그는 자기의 감정을 억제하도록 가르침을 받고 있습니다. 남을 위해서 애통하기를 배우는 대신에 그는 한 어른으로 성장하기 위해서 자기의 감정을 억제해야 한다고 가르침을 받습니다. 그는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 마음속에서 기쁜 마음을 불러 일으켜 줄 환경에서 도피함으로서 자기의 감정을 억제하려고 합니다. 그는 비극적인 일은 보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는 또한 자기의 마음을 무디게 하고 자기의 감수성을 억제함으로서 마땅히 울어야 할 때에도 울지 않으려고 애를 씁니다. '다 큰놈이 울면 못써요' 라고 하는 말의 배후에는 진실성이 없지 않으나 이것은 예수의 교훈과 정 반대가 됩니다.
부모들은 자기의 자식들이 용감해 지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들은 인간으로서의 고상한 성품을 억제함으로서 그들의 목적을 잃어버립니다. 성경에는 타인의 불행에 대하여 애타게 슬퍼한 위대한 용기를 가진 사람들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 이름을 열거하면 모세, 아브라함, 사무엘, 다윗, 엘리야, 예레미야, 이사야, 아모스, 그리고 호세아를 들 수가 있습니다. 그 중에도 예수는 완전한 용기의 소유자 였습니다. 그는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거나 이스라엘의 운명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나타내거나 혹은 사랑하는 친구의 죽음으로 인해서 울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신약성서 가운데 가장 감동적인 구절은 '예수가 우시더라' 입니다. 반면에 감정의 지배를 받지 않은 비정의 인물은 골리앗과 요압, 그리고 삼손입니다.
◑ 긍휼이 여기는
자
긍휼이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5:7)
많은 사람들은 긍휼을 수동적이며 완전히 소극적인 덕으로 간주하고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할 사람에게도 벌을 주지 아니하는 행위가 긍휼에 해당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분명히 예수가 가르치신 긍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는 긍휼이 수동적 덕행이 아니라 그 자체가 행동으로 표시되는 적극적 덕행 임을 가르치셨습니다. 긍휼은
타인의 정신적 혹은 육체적 고난을 예방하는 행위로 정의될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다시 아버지의 사랑은 그 자체가 긍휼의 형식을 빌려서
나타납니다. 부모들은 그의 자녀들이 마주치게 될 장애물을 미리 내다봅니다. 그들은 자녀들을 이러한 장애물로부터 건져내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하며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그들에게 줍니다.
예수가 가르치신 긍휼의 개념은 그의 생활
가운데서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는 간음하다가 붙잡혀 온 여인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사람들은 그녀를 돌로 쳐서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는 여인에게 '내가 너를 정죄하지 아니 하노라'고 말씀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여인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예수의 본을 따라서 긍휼을 베풀고자 하는 사람은 타인에 대하여 용서할 줄 아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긍휼은 자기의 원수를 사랑할 수 있게 해 줍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뜻을 거스른 자에게 보복을 하는 대신에 오히려 그들을 용서해 줍니다. 이것이 진정한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자식이 아버지에게 죄를 범했을 때 보복을 하는 대신에 그 자식을 용서하고 자기의 품안에 돌아오기를 바랍니다. 탕자의 비유는 아버지의 긍휼을 나타내는 좋은 예가 됩니다.
긍휼의 미덕을 배우기는 쉽지 않습니다. 부모들은 자식들이 불행과 슬픔 가운데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 밤잠을 못 자고 애를 씁니다. 긍휼은 벌을 주어야 할 때에 주지 않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어린이에게 채찍질하는 것은 그냥 내버려두는 것보다 몇 배나 더 긍휼을 베푸는 행위가 됩니다. 긍휼은 언제나 다른 사람의 행복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태도입니다. 부성애가 우리의 행위를 지배할 때에만 긍휼을 베풀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아이로 하여금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을 갖도록 가르치는데 쓰여지는 똑같은 방법이 그
아이에게도 쓰여질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궁핍에 대하여 동정을 베풀 줄 아는 사람 즉, 애통해 할 줄 아는 사람은 그를 위해서
무엇인가 봉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이들은 자기보다 더 어린 아기들이나 동물들에게 긍휼을 베풀도록 가르침을 받는다면 그는 어른이
되었을 때 더욱 행복해 질 수가 있을 것입니다. 어린아이에게 다른 사람의 궁핍에 대하여 모른 체 하도록 가르치거나 혹은 그에게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행복이라고 가르치는 것은 그가 일생동안 좌절과 불행 속에서 고통을 받도록 저주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도의 힘 (0) | 2005.08.26 |
---|---|
화목, 핍박 받는 자의 복 (0) | 2005.08.26 |
온유한 자, 청결한 자 (0) | 2005.08.26 |
가난한 자, 의에주린자 (0) | 2005.08.26 |
청결한자는 (0) | 2005.08.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