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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구약중간시대1

redcap 2005. 8. 23. 12:53

***  신구약 중간시대***

 1. 중간시대
   중간시대란 구약과 신약 사이의 시기를 말하는 것으로 BC424년으로 부터 BC5년  까
진의 기간을 말한다.
   1) 파사시대
     BC536년 부터 BC331년 까지
   2) 헬라시대
     BC331년 - BC167년
 (1) 헬라시대 BC331년 - 323년
 (2) 애굽시대 BC323년 - 198년
 (3) 수리아시대 BC198년 - 167년
   3) 마카비시대
     BC167년 - BC63년
   4) 로마시대
     BC63년 - BC5년

 2. 파사시대
   1) 영적쇠퇴기 : 학개와 말라기서에서 참조할 것.
   2) 대제사장들이 정치 권력을 잡음.

 3. 알렉산더 대왕
   1) 알렉산더의 배경
 (1) 마케돈의 필립은 희랍 도시국가를 통일한 후 그를 축하하다가 저격당함.
 (2) 필립의 아들 알렉산더가 자기 아버지를 계승하여 왕이 된 후 그는  위대한  희랍
철학자 알리스토틀 밑에서 수학하여 희랍문화에 헌신함.
   2) 알렉산더의 전과
 (1) 그가 희랍 반도를 점령한 후 파사를 대항하여 소아시아  지방  으로  진격(334년
BC)
 (2) BC333년에는 그는 잇수스에서 다리우스 왕을 만나 파사정복의 길을 얻어냄.
 (3) 그는 애굽으로 계속하여 진격(332년 BC에는 드로를 점령함).
애굽에 들어간 알렉산더는 자기의 이름을 따라 알렉산드리아로 시를 건설하고  상업과
희랍문화의 중심지로 삼고 다리우스의 평화조약을 요청 받았으나 이를 거절하고  파사
를 점령함(331년BC)
 (4) 이듬해 인도의 인디스강을 공격하였으나 군인들의 피로로 바빌론으로 회궁함.
 (5) BC323년, 그의 나이 33세시에 말라리아와 음주 방탕한 결과로 죽음.
   3) 알렉산더의 영향
 (1) 그는 고대 세계에 희랍문화와 상업의 중심도시를 건설하고 그곳에 희랍인들을 이
주시킴. (약 70개 도시)
 (2) 희랍문화는 알렉산더가 정복한 모든 곳에 침투하기를 시작함.
 (3) 희랍어가 고대사회 전체에 확산 사용됨.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수천개의  파
피리가 모두 희랍어로 되어 있음)
 (4) 기독교를 위한 두가지 중요한 준비작업
    (까) 설교를 희랍어로 누구에게나 할 수 있음.
        (Universal Preaehing)
    (다)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책이 가능함. (70인 여과 신약 희랍어 성경)

 4.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와 마키비 혁명

   1) 알렉산더 사망 이후 주전 301년 입수스(Ipsus) 전장터에서 희랍제국은 네  조각
으로 분열되었다. 애굽과 팔레스틴은 틀레미 소터 (Ptolemy Soter) 에게, 그리고 수리
아는 셀리우쿠스(Seleucus) 에게 통치 되었다.
   2) 틀레미 왕조는 주전 198년까지, 셀리우쿠스 왕조가 유다를 수리아에 병합할  때
까지, 팔레스틴을 통치했다. (셀리우쿠스 왕조는 자기들을  희랍문화의  사도들이라고
까지 불렀다)
   3) 팔레스틴을 점령한 셀리우쿠스 왕조의 지배자 안티오쿠스는 그의 아들 셀리우쿠
스 피로파터 (Selecus Philopater) 에게 대권을 넘겨주었다.
 4) 그러나 셀리우쿠스 필로파터는  그의  아들  중  하나인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Antiochus Epiphanes) 에게 독살 당하고 말았다. (주전 175년)
   5) 에피파네스라는 이름의 뜻은 신의 현현이라는 말이지만 그의 만행으로 인해  사
람들은 그를 에피마네스(Epimanes) 즉 '미친놈' 이라고 불렀다.
   6) 당시 국수주의자 중 지도자로 있었던 대제사장 오니아스 3세(Onias III)와 그의
동생이며 헬레니스트로 알려진 야손(Jason) 사이에 무서운 암투가 있었다.
   7) 야손은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에게 거액의 돈을 약속하고 자기 형의 대제사장직
을 취한 후 예루살렘을 헬라화하는 일에 박차를 가했다. 그는 예루살렘을 헬라 도시인
안디옥 시민으로 등록케 하고, 성전 지하실에는 희랍의 체육관을 건립하였다.  청년들
은 물론 제사장까지도 체육에 참여케 하고, 할례와 같은 유대 종교의 흔적을 제거하도
룐 노력하였다.
   8) 안티오쿠스는 여러차례 애굽에 원정을 갔다. 그의 2차  원정시  팔레스틴에서는
그가 죽었다는 소문이 나돌자 많은 유대인들은 크게 기뻐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안티
오쿠스는 하루 동안에 유대인 4만명을 학살하였다. 또한 수많은 유대인들은 노예로 팔
렸고, 성전은 약탈당했다.
   9) 또 다시 애굽에 원정을 하던 중, 그는 로마군에 의해 회군하고 말았다. 그는 자
기가 당한 굴욕을 돌아오는 길에 예루살렘에다가 퍼 부었다.
   10) 예루살렘은 더 이상 유대인의 중심지가 아니고 이제는 희랍문화의 요새지가 되
었다. 예루살렘이 당했던 가장 큰 목욕은 성전을 제우스신전으로 둔갑을 시킨 일이다.
주전 168년 12월 15일에는 소제를 드리는 제단 꼭대기에 제우스신에게 제사하는  제단
을 만들어 세웠다. 유대인들은 오늘까지도 이 날을 "황폐의 증오"라고 부른다. 그로부
터 10일 후 즉 12월 25일에는 돼지를 희생제물로 잡아 그 피를 거룩한 곳에  뿌리기도
했다. (I Macc 1:54, 59:Josephus, Ant. XII. 5, 4; 단 9:27, 11;31;12;11마24;15).
유대인들은 안티오쿠스의 이같은 죄를 더 이상 용서할 수가 없게 되었다.
   11) 주전 167년경 예루살렘 서북쪽에 있는  모데인(Modein)의  제사장  마타티아스
(Mattathias) 가 일어난 안티오쿠스의 희랍화운동에 항거하는 운동을  일으키게  되었
다.
     (1) 그는 이방 희랍신들에게 희생을 바치는 것을 거부했다.
     (2) 그는 그같은 제물을 바치는 유대인 배신자들을 잡아 살해했다.
     (3) 그는 모데인 지방에 와서 헬라화운동을 벌리고 있는 안티오쿠스의  하수인들
을 살해했다.
     (4) 마타티아스는 그의 다섯 아들들과 함께 산으로 도망해 갔으나 열심있는 유대
인들이 그들을 따라 산중에 모여들었다.
     (5) 팔레스틴을 헬라화하려는 시도에 대항하여 이들은 게릴라 작전으로 맞섰다.
     (6) 배신자들은 살해 되었고, 이방신전은 파괴되었으며, 유대인의  의식은  다시
회복되었으며, 회당이 다시 열리게 되었다.
      (7)  마타티아스는  주전  166년에  자기의  세째  아들인  유다  마카비(Judas
Maccabeus- 두드리는 망치라는 별명) 에게 자기의 자리를 물려주고  노사(로사)  하였
다. (I Macc. 2:50에 보면 마타티아스는 자기 아들들에게 "율법에 대하여는 열심을 다
하고, 우리 조상들의 계약을 지키기 위하여는 네 생명을 바치라" 고 명령하고 있다.)
   12) 유다 마카비(166-161BC)의 공적은 유대 역사에 특기할 만하다.
     (1) 안티오쿠스는 유다 마카비의 반란을 평정하기 위하여 6,000명의 군대를 두패
로 나누어 파견하였다. 그러나 유다는 두 전쟁에서 모두 승리를 거두었다.
     (2) 안티오쿠스는 다시 60,000명의 군대를 파송하여 마카비 반란군 평정에  나섰
다. 당시 6,000명의 군대를 갖고 있던 마카비는 두려워 하는 이는 모두 집으로 돌려보
내고 300며의 정예군으로 야간에 수리아군을 기습 공격하여 도주하는 그들을 맹타하였
다.(BC166년)
     (3) 유다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성전을 청소하고 여호와께 다시 헌당하였다. 이
날이  BC165년  12월  25일로  요한복음  10장  22절에  나오는  수전절(Festival  of
Hanukkah)이다. 이 때가 돼지로 제물을 바쳐 하나님을 모독한지 3년이 지난 후며,  유
다는 BC164년에 성전 재봉헌을 위한 헌당식을 성대히 거행하였다.(I  Macc.  4:52-59;
Josephus, Ant. XII. 7.7; 요 10:22)
     (4)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는 주전 164년 팔레스틴의 반란을 평정키 위해 원정을
오던 도중에서 죽었다.
     (5) 그리하여 유다는 예루살렘에서 전권을 잡고 주전163년에는 팔레스틴의  치리
자(governor)로서 인정을 받게 되었다.
     (6) 그후 주전 160년에는 유다와 그형제들이 완전 독립을 위해서 계속 투쟁을 벌
였으나, 유다가 죽고, 그 동생 요나단(대제사장인 Jonathan)이 군대를 지휘하게  되었
다. 이 때 수리아에는 내분이 있어, 유대인들은 이 기간동안 평화를 유지할 수가 있었
으며, 요나단은 로마와 스팔타와의 동맹을 맺어서 외세의 보호까지 받게 되었다. 그러
나 주전 142년 트리포의 수리아 장군에게 요나단이 살해되므로 마지막 남은 동생 시몬
(Simon)에게 지도권이 넘어갔다. 그해 수리아 왕 디메트리우스 2세 (Demetrius II) 는
유대민족에게 완전 독립을 허락했다.

 5.  헤롯대왕

   1) 유다 마카비의 형제 요나단과 시몬의 지도하에 주전 63년 까지  즉  로마세력이
들어오기까지, 팔레스틴은 마카비 가족의 치리하에 있었다(약 80년간  국가적  자유가
지속 되었음).
   2) 이같은 세상 권세잡은 이가 종교적 지도권까지 겸하게 되므로 자연히 마카비 가
문의 영적 타락상이 노출되기 시작했다.
   3) 마카비 통치 후기에 안티파터(Antipater)라는 이의 이름이 중요하게  등장한다.
그는 이두메인으로 로마정부 하에서 자기 세력을 확장시키려고 노력을 한 사람이다.
   4) 그가 유다의  행정관으로  있을때,  자기  아들  헤롯을  갈릴리  지방의  영주
(tetrarch)로 임명하였다. 이 때 헤롯은 갈릴리 지방의 백성들을 괴롭히던 도적떼들을
소탕해 냄으로 그의 실력을 입증해 냈다.
   5) 주전 40년 안티파퍼가 죽은 후 헤롯은 유다의 왕으로 거의 지명을 받게 되었다.
주전 37년까지 그는 유대인들의 반대를 거의 무마시키고 사실상 왕이 되었다.
   6) 헤롯의 33년 통치기간을 3등분하여 설명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Fairweather,
FETA, p. 194).
     (1) 처음 12년간 (37-25BC)은 자기 권력을 안정키 위해 힘을 사용하였다.
     (2) 다음 12년간 (25-13BC)은 그의 통치 기간중 황금기라고 할 수 있다.
     (3) 마지막 9년간 (13-4BC)은 비인간적 처사로 잔인하고 난폭한  생활을  보여준
다. 그는 자기의 두 아들을 돼지처럼 죽이기까지 한 폭군이 되었다.
   7) 헤롯의 치적을 살펴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1) 그는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처럼 희랍화운동을  하였지만  안티오쿠스보다는
기술적으로 일을 처리함으로써 비교적 성공한 예가 많다.
     (2) 그는 전람회, 운동회, 원형극장 건립, 그리고 헤롯을 따르는 청년들을  따로
조직하는 일까지 했다.
     (3) 그는 예루살렘에 안토니아라고 부르는 요새를 확장시켰다.(행21:34 참조)
     (4) 그는 스룹바벧의 성전을 재건하였다. 유대인들은 처음부터 그의 계획에 회의
적이었기 때문에, 헤롯도 아주 조심스럽게 그들을 해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성전은
주전 20년 또는 19년에 시작 되었다. 18개월 동안에 성전의 본전은 완성되었지만,  주
후64년까지 성전 전체의 완공은 되지 않았다. 요2:20에서 유대인들은 이 성전이  46년
간 지어졌다고 말하고 있다.(그 당시가 주후26년 또는 27년)
   8) 헤롯은 그리스도의 출생시 팔레스타인의 통치자로 있었다.
     (1) 헤롯과 동방 박사 (마2:1-12)
     (2) 헤롯의 베들레헴 유아살해(마 2:16-18)
   9) 신약 성경에는 헤롯이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들이 여럿이 나온다.  다음은  헤롯
족보를 보여주는 도표이다

                      헤롯 대왕 (마 2장)

               (a)              (b)             (c)             (d)
                |                |               |               |
   +------------+    +-----------+               |               +--+
 빌립            아리스토블르스                 빌립        +-------+-------+
(눅3장)              |                         (마14장)     |               |
              +------+---------------------------+       헤롯안티파스 아켈라오
              |                                  |          (눅3장)    (마2:22)
      헤롯 아그립바1세                        헤로디아
          (행 12장)                              |
            +-----------------+----------+     실로매
  헤롯 아그립바2세          버니게       |     (마14장)
       (행25장)         (행25:13,26:30)  |
                                         |
                                      드루실라
                                     (행24:14)

<도표설명>
  * 통치자의 위에 오른자의 이름 아래에는 줄을 그었음.
 ** 두줄을 그은 것은 결혼 관계를 가리킨다.
*** 헤롯 대왕의 열명의 아내중 성경과 연관된 네 여인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a) 예루살렘의 클레오파트라
   (b) 죤힐카누스의 손녀 미리암네
   (c) 대제사장 시므온의 딸 미리암네
   (d) 사마리아 여인 말타스
10) 헤롯 대왕의 치리로부터
    유다-로마 전쟁까지 팔레스틴의 통치권자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
  |  37BC                                                              37BC  |
  |                헤롯대왕이 팔레스틴 전역을 왕으로 통치                    |
  |  4BC ------------------+------------------------+------------------ 4BC  |
  |            유다        |        이두레아        |       갈릴리           |
  |          사마리아      |      트라코니티스      |       베뢰아           |
  |           이두메       |                        |  (헤롯 안티파스가      |
  |     (아케라우스가      |     (빌립이 이 지방    |  이 지방의 영주로      |
  |      이지역의 치리자)  |      의 영주로 다스림) |  다스림)               |
  |                                                                          |
  +--------  AD 6년 -------+                        |                        |
  |                        +---------AD 34년--------+                        |
  |      로마총독의 통치                                                     |
  |                        +---------AD 37년 -------+                        |
  +----------AD 41년-------+                        +------- AD 39년 --------+
  |                             헤롯 아그립바 1세                            |
  +----------AD 44년---------------------------------------- AD 44년         |
  |                              로마 총독의 통치                            |
  |                        +----------AD 53년-------+      AD 56년 또는      |
  |                        |     헤롯 아그립바2세   +------AD 61년-----------+
  |                        |                        아그립바 2세하에         |
  |                        |                        부분적 통치              |

  AD 66년                                                               AD 66년


1. 중간 시대를 연대별로 개관하라
2. 알렉산더의 영향에 대하여 약술하라
3.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희랍화 운동에 항거하는 측면에서 마카비 혁명을  묘사하
라.
4. 헤롯 대왕의 치적을 열거하라

제 6 장 로마제국

   신약성경이 씌어질 당시 전 문명세계는 별로 알려지지 않은 극동의 몇몇 나라를 제
외하고는 모두 로마의 지배 아래 있었다. 당시 로마제국은 서쪽으로는 대서양에서  부
터 동쪽으로는 유프라테스강과 홍해까지, 북쪽으로는 론(Rhone)강, 다뉴브(Danube)강,
흑해와 코카서스(Caucasus) 산맥으로 부터 남쪽으로는 사하라 사막에 이르기까지 하나
의 거대한 제국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신약 성경에서 "왕"(벧전 2:17), 혹은  "아구스
도"(눅 2:1)라고 기록하고 있는 황제에 의해 실제로 통치하고 있었다.
   로마라는 이름은 이탈리아의 수도의 명칭을 그대로 따온 것인데, 로마제국은  바로
그곳에서 일어났다. B.C.753년 그들이 처음으로 창건 되었을때, 그들은  인접한  작은
마을들의 연합체로 이루어져 한 왕의 지배를 받던 공동체에 지난지 않았다. 5세기  초
엽부터는 공화정의 체제 아래 점차적으로 견고한 정치적 조직을 이루게 되었다.  주변
에 위치한 동맹체들과의 동맹과, 북쪽의 에트루리안족, 남쪽의 여러 다른  부족들과의
계속되는 전쟁의 승리로 로마는 B.C. 265년에 이르러서는 이탈리아  반도의  종주국이
되었다. 정복된 민족들은 평화조약으로 묶여있다가 점차로 로마의 지배아래  흡수되었
다.
   그후 로마는 2세기 동안 지중해 서쪽의 주된 해상세력인 카르타고와 큰 싸움을  치
렀다. 카르타고는 원래 페니키아(Phoenicia)의 속령이었으나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종
주국이 붕괴되자, 독자적으로 처신할 수 있게 되었다.
   페니키아의 본을 따라서 카르타고는 부유하고 강력한 나라가 되었다. 그들의  배는
지중해의 무역품들을 운송하였다. 그들의 문화는 성격상 동양적이었고 그들의  사회는
용병에 의해 유지되는 과두정치체제였으며 독재법에 의해 다스려지고 있었다.  로마가
팽창해감에 따라 그들은 자연히 카르타고 제국의 전진기지들과 충돌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두 개의 문명이 그 종족의 기원이나 정치이론에 있어서 서로 상이하다는
사실을 차치하고서라도 한 영토에서 두 세력이 공존할 여지가 없었으며 따라서 필연코
어느 하나가 물러서야만 했다. 그들 사이의 전쟁은 B.C. 146년 로마장군 스키피오  에
이밀리아누스(Seipio Aemilianus)가 카르타고의 수도를 정복하고 초토화한 후 끝이 났
다. 그 결과 로마는 스페인과 북 아프리카까지 지배하게 되었으며 그와 동시에 마게도
니아가 로마의 영토가 되었고 같은 해 (B.C.146) 고린도의 점령으로 아가야(Achaia)가
로마의 지배 아래 들어왔다.
   B.C.133년에는 버가멈(Pergamum)의 왕 아탈루스 3세 (Attalus III) 가 죽으면서 자
기의 영토를 로마에 넘겨주었다. 그때로부터 로마는 아시아를 조직했다. 소아시아  동
부지역에서의 전쟁은 폼페이 장군이 본도(Pontus)와 코카서스(Caucasus)의 정복을  마
칠 때까지 계속되었다.
   B.C 63년에 그는 시리아를 로마의 속령으로 만들었고, 유대를 합병했다.  B.C.58년
과 57년에 가이사(Caesar)는 그 유명한 골 (Gaul)지방 원정을 감행하여 그곳을 로마제
국으로 만들었다. 이와같이 하여 거의 500년 간 계속된 전쟁을 통하여  티베르(Tiber)
강가의 이름없는 한 부족에서 시작된 로마는 세계의 대제국이 되었다.
   이렇듯 급격한 영토의 확장은 로마인들의 생활에 큰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권력의
맛을 알게 된 군대의 지도자들이 군대를 이용하여 외국을 정복하였을 뿐만 아니라, 국
내에서 자신들의 정치적인 지위를 강화하는 데도 사용하였다.
   카르타고와 그리이스의 정복, 그리고 줄리어스 시이저의 죽음 사이에 거쳐  흘러간
한 세기는 계속적인 내란으로 점철되었다.  마리우스(Marius),  술라(Sulla),  시이저
(Ceasar), 안토니(Antony), 그리고 옥타비안(Octavian) 등은 계속해서 자신이  로마제
국의 주인의 자리를  유지하기  위하여  투쟁했으나  결국  원로원에  위해  아구스도
(Augustus)라고 불리운 옥타비안이 B.C.30년에 그의 정적들을 물리치고 첫 황제가  되
었다.

1. 아구스도 (Augustus 27 B.C.- A.D.14)

   그의 통치 아래 로마의 주권(imperium)이 완전히 확립되었다. 전쟁에 지친  시민들
은 평화를 갈망하였다. 아구스도는 제국내에서 첫번째 시민인 princeps가 되었다.  그
는 현명하고 어질게 통치했다. 정치적으로 새로이 등장한 참 주제는 옛날의  공화제와
줄리어스 시이저가 옹호했던 독재체제를 절충한 것이었다. 원로원(Senate)은 이론상의
통치기관으로 존속되었다. B.C.27년에 원로원은 아구스도에게 제국  군대의  원수직을
수여하였다.
   B.C.23년에 그는 또한 호민관의 직위를 부여 받았는데, 그것은 그가 평민들을 다스
릴 권한이 있으며 백성들의 영원한 대표자가 된다는 뜻이었다.  그에게는  원로원에서
첫 회의의 주제발언을 할 수 있는 특권과 함께 회의를 소집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
다. 그의 모든 권리들은 권력의 비호아래 된 것이라기 보다는 모두 법적 근거  위에서
주어진 것이었다.
   아구스도의 통치기간 동안 많은 개혁이 있었다. 원로원에서 필요없는 인원들이  제
거되었다. 대부분의 군대가 해산되었고 제복을 벗은 무관들은 속국이나 매수한 지역에
정착시켰다. 그런 후에 하나의 정식 전문 군대가 조직되었는데 그것이 시민들을  위한
학교가 되었다. 직위해제를 당한 군인들에게는 상여금을 주어서 속국의 영토에 정착케
했고 그들은 그곳에서 편안히 살면서 로마에 충성하는 공동체의 지도자들이 될 수  있
었다.
   아구스도는 또한 사람들의 도덕수준을 높이려고 했다. 그는 국가 종교를  부흥시켰
고 많은 사원들을 짓게 했다. 제국숭배. 즉 국가로서의 로마에 대한 숭배는  속령들에
도 도입되었다. 제국내의 여러 지역에서 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황제  자신이  "주와
신"(Dominus et Deus)으로 숭배되었다. 주전 18. 19세기의 쥴리안 법은 결혼을 장려하
고 가정을 이루게 함으로써 가족생활을 회복시키려 하였다.
   제국 전체를 견고케 하기 위해 그는 군대를 모집하였고, 세금을 거두기 위한  근거
로써 인구와 재산 조사를 실시했다. 스페인과 골, 알프스 지역들이 정복되었다.  그는
변방의 방어를 강화하였다. 그러나 튜트버그(Teutoberg) 숲속에서 그의 군대가 독일인
들의 손에 의해 참패를 당하기도 했다. 아구스도는 로마에 경찰과 소방소를  조직했고
곡물의 공급을 감독하는 감독관을 임명하였다.
    아구스도에게 있어 또 한가지의 업적은 그가 로마라는 벽돌을 발견하여 그것을 대
리석으로 만들어 놓았다는 것이다. 41년 간에 걸친 그의 통치기간 동안에  그는  혼돈
가운데서 질서를 이루어 놓았다. 그는 정부에 대한 신뢰감을 회복시켰고, 재정을 튼튼
히 했으며 능률적인 공공기관들을 새로이 창설하여 평화와 번영을 증진시켰다.

2. 디베료 (Tiberius A.D.14 - 37)
   아구도스가 죽자 그의 양자 디베료가 그의 자리를 물려받게 되었다. 아구스도가 헌
법에 의해 제한된 기간 동안 위임받았던 권세(imperium)를 디베료는 평생동안 누릴 수
있었다. 그가 권력을 승계받았을 때 그의 나이는 56세였으며 그 이전에도 계속 국가의
공직에 몸 담고 있었으므로 정치에 있어서 그는 결코 초년병이 아니었다.  불행하게도
아구스도가 그에게 평소 사랑했던 아내와 이혼할 것을 권고하여, 그는 공개적으로  방
탕한 생활을 하던 아구스도의 딸 쥴리아와 결혼하게 되었다. 이때 그가 겪었던 쓰라린
체험은 그의 기질을 영영 비뚤어지게 하였다. 그는 냉담하고 오만하고 의심이 많고 성
미가 급했다. 그가 비록 정치에 있어서는 편협하지 않았고 현명했지만, 다른 여러가지
면에서 그는 두려움을 주는 존재였고 존경을 받지 못한 황제였다.
   그의 통치기간 동안 로마의 군대는 독일에서 역전을 당했으며 그 결과  라인강까지
후퇴하게 되었다. 그외에도 국내적 문제들로 인해 그의 말년은 어두웠다. 그러자 그는
A.D.26년에 정부를 시지사(city prefect) 의 손에 맡기고  카프리섬으로  은퇴하였다.
디베료가  없는  것을  기회로  그의  친위대장이었던  에일리우스   세쟈누스(Aelius
Sejanus) 가 참주권을 차지하기 위한 모의를 감행하였다. 그의 계획들은 거의  완벽하
게 진행되었으나 A.D.31년 디베료가 그 사실을 알게 되었고 세쟈누스가 처형됨으로 모
의는 끝이 났다. 그러나 그것이 디베료에게 미친 영향은 결정적인 것이었다. 그는  한
층 더 의심이 많아졌고 잔인해져서, 조그마한 혐의만 있어도 누구든지 죽음을  감수해
야 했다. A.D.37년 그가 죽자 원로원은 다시 자유롭게 숨을 쉴 수 있었다.

3.갈리굴라(Caligula A.D. 37-41)

   군대의 애칭으로 "작은신발" 이라고 불리우기도 했던 가이어스 갈리굴라가  원로원
에 의해 디베료의 후계자로 지목되었다. 그는 디베료와는 달리 출발부터 인기가  좋았
다. 그는 정치범들을 사면하여 주었고 세금을 인하했으나 공공유락 시설을 마련하였고
대중에게 호의를 베풀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서 그는 그의 심약함을  드러
내기 시작했다. 그는 신으로 숭앙받기를 요구했는데 이것이 그의 영토내에 있는  유대
인들을 자극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헤롯 아그립바(Herod Agrippa) 가 알렉산드리아를 방문하였을때  그곳의  시민들은
그와 그의 수행원들에게 풍자문을 써서 공개적으로 모욕을 주었다. 그러자 유대인들에
게 가이어스의 상(Statue)을 예배하도록 강요하려 했다.
   유대인들은 황제에게 탄원했다. 그러나 황제는 그들의 말에  귀기울이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시리아의 지방총독에게 예루살렘 성전에 자기의 상을  세우도록  명령했
다. 그총독은 현명하게도 무장 봉기의 위험을 감안하여 명령의 수행을 연기했다. 그리
고  A.D.41년 갈리굴라의 죽음으로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어떤  이들은  마가복음에
기록된 "멸망의 가증한 것"(abomination of desolation) 이 바로 예루살렘 성전에  들
어 앉으려 하는 황제의 상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막 13:14)
   아구도스와 디베료가 그처럼 힘들여 모아 놓았던 자금을 갈리굴라가 흥청망청 써버
려 국고는 금방 바닥이 나버렸다. 그것을 다시 채우기 위해 그는 폭력적인 수단을  사
용하여 사유재산의 압수 유산 탈취 및 갖가지의 착취행위 등을 서슴지  않았다.  그의
독재가 극에 달하게 되었을 때, 그는 황실 경호대장에 의해 살해되었다.
4. 글라우디오(Claudius A.D. 41-54)

   갈리굴라가 죽자 원로원은 공화정의 부활을 논의했다. 그러나 친위대가 디베료  글
라우디오 게르마니쿠스(Tiberius Claudius Germanicus)를 황제로 내 세우자 그 문제는
종식되었다. 그는 디베료나 갈리굴라의 치세 때에는 별로 이름이 없던 인물이었다. 더
군다나 그는 정치활동에 참여하지도 않았다. 소아마비로 추측되는 어린 시절의 질병으
로 인해 그의 외모는 매우 유약해 보였으며 흐느적거리는 몸놀림과 단정치 못한  모습
은 황제로서의 위엄을 갖추기에는 너무나도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다. 그러나  열등감
같은 것은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훌륭한 학자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그  시대의
사람들의 기대 이상으로 더 유능한 통치자로서 활동하였다.
   영토가 급격히 확장되면서 좀 더 능률적인 새로운 형태의 정부가 요구되었다. 글라
우디오 치하에서 로마는 위원회와 각료들에 의해 다스려지는 관료국가가 되었다. 그는
로마의 시민권을 자국 외의 영토민들에게까지 확장시켰다. 그의 장군들은 영국에 까지
진출하는데 성공하였으며 북으로 템즈강까지 정복하였다. 또한 이무렵에 로마의  동맹
국이었던 트라키아(Thrace: 발칸반도 동부에 있던 고대국가, 역자주)가 왕자의 죽음과
함께 로마의 통치령이 되었다.
   글라우디오는  고대 로마의 종교를 사회속에 재건시키기 위해  결정적인  시도들을
했다. 그러했던 만큼 그는 이방종교에 대해서는 상당한 적대감을 갖고 있었다. 역사가
수에토니어스(Suetonius) 는  글라우디오  치하에서  일단의  유대인들이  크레스투스
(Chrestus) 라는 사람의 선동에 의해 벌어진 폭동들 때문에 로마에서 추방되었다고 기
록하였다.
   수에토니어스가 크리스투스(Christus)를 크레스투스로 오해하였는지, 그리고  그가
말한 사건이 그리스도로서의 예수에 대한 전파로 인해 유대인들 사이에 일어난 소요를
가리키고 있는지, 혹은 크레스투스가 실제로 반란의 주동자였는지는 확실치 않다.  어
쨋든, 그 추방령으로 인해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Aquila and Priscilla)가 로마로 옮
겨온 것은 사실이었다. (행 18:2)
   그의 자유인들 중의 하나였던 발라스(Pallas)의 영향을 받아 글라우디오는 그의 조
카 아그립비나(Agrippina)를 네번째 아내로 맞아들였다. 그녀는 전남편에게서 난 아들
도미티우스(Domitius)를 위해 계승권을 획득하려고 결심했다. 도미티우스는 네로 글라
우디오 가이사(Nero Claudius Caesar)라는 이름으로 글라우디오의 정식  양자가  되었
다. A.D.53년에 네로는 글라우디오의 딸 옥타비아와 결혼하였다. 일년 후에  글라우디
오는 죽었으며 황제의 자리는 네로에게 이어졌다.

5. 네로 (Nero A.D.54-68)

   네로 치하에서의 첫 5년은 평화스럽고 성공적인 나날들이었다. 친위대장  아프라니
어스 부루스(Afranius Burrus)와 철학자이자 저술가인  안네우스  세네카(L.  Annaeus
Seneca)를 그의 조언자로 삼고 네로는 그의 천하를 매우 잘 다스려 나갔다. 그러나 아
그립비나는 그와 그의 충고자를 시기하여 그에 대한 우월권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A.D.59년에는 그는 그의 어머니를 살해했다. 그리고는 자신이 통치의 전권을 장악하였
다.
   네로는 기질상 행정가라기보다는 예술가였다. 그는 행정에서 뛰어나려 하기 보다는
예술가로서 처신하려 하였다. 그는 방탕과 사치로 인해 국고를 탕진하였다. 그리고 그
것을 충당하기 위해 갈리굴라처럼 억압과 폭력에 의존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원
로원의 미움을 샀다. 원로원의 의원들은 네로가 언제 자기들을 죽이고 자기들의  재산
을 몰수할지 몰랐으므로 그를 두려워했다.
   A.D.64년 도시의 많은 부분을 태워버린 대화제가 로마에 발생했다. 이때에  네로는
자기의 새로운 황금집 (Golden House)을 짓기 위하여 고의적으로 불을 지르게  했다는
의혹을 사게 되었다.
   실제로 그는 에스킬라인 언덕에 찬란한 왕궁을 세웠다. 자신에 대한 혐의의 화살을
피하기 위해 그는 그 화재를 기독교인들의 소행으로 덮어씌었다. 이방인들에 대한  기
독교인들의 배타적인 태도와, 언젠가는 세상이 불로 심판당하리라는 그들의 말 때문에
그러한 모함은 쉽게 먹혀들어갔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잡혀 고문을 당하고 죽었다. 전
승에 따르면 베드로와 바울도 국가가 주동이 된 이 첫번째 박해의 희생물이  되었다고
한다.
   이때의 핍박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아마
그것이 로마의 영토 밖에까지는 미치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의 통치령들이 위협을 받았
던 것은 사실일 것이다.(벧전 4:12-19)
   그러는 동안 네로는 이렇게 지나친 행동들로 인해 점점 신임을 잃어갔다. 그에  대
한 몇 번의 반역은 실패로 끝났고 그의 정적들은 처형되었다. 그러나 결국은 골과  스
페인 지방의 군대와 총독들의 봉기가 성공하였다. 네로는 로마에서 도망쳤다.  그리고
그는 체포되기 전에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끊어버렸다.

6. 갈바(Galba A.D.68)

   군단의 봉기로 인해 제국의 실질적인 운명이 군대에 의해 좌우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군대는 원로원의 상의없이도 후보자를 지명할 수 있었고 등극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네로의 후계자인 갈바는 군단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지명된  것은
아니었다. 갈바가 자기의 후계자로 후시어스 갈버니어스 피소를 양자로 삼자, 한때 자
신이 황제가 될 희망을 안고 갈바를 지지했던 오토(Otho)는 친위대를 설득하여 갈바를
죽이게 하고 자신이 황제의 자리에 올라섰다.

7. 오토(Otho A.D.69)

   오토의 통치기간은 짧았다. 원로원은 그를 후계자로 지목하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
았다. 그러나 독일의 지방총독이었던 비텔리우스(Vitellius)가 그의 군대를 이끌고 로
마로 들어왔을 때, 오토는 싸움에서 사망하고 비텔리우스가 그의 자리를 차지하였다.

8. 비텔리우스(Vitellius A.D.69)

   비텔리우스는 원로원에 의해 인준을 받았으나 군대를 제어할 능력도 없었고 그렇다
고 안정된 정부도 이루지 못했다. 동방에 주둔하였던 부대가 국사에 관여했고  급기야
는 그들의 장군인 베스파시안을 황제로 삼았다. 베스파시안은 나라 일을 자기 아들 디
도(Titus)에게 맡기고 이집트로 행군하여 그지역을 장악하고 로마에 대한  식량공급을
중단시켰다. 그리고 그는 보조관인 무치아누스(Mucianus)를 이탈리아로 보냈다.  비텔
리우스 군단의 완강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베스파시안의 군대는  로마를  점령하여버렸
다. 비텔리우스는 살해되었고 베스파시안이 통치자로 선포되었다.

9. 베스파시안(Vespasian A.D. 69-79)

   베스파시안은 평범한 노병이었다. 그는 소박한 편이었으나, 행정에 있어서는  활발
한 사람이었다. 그는 바타비아와 골 지방의 봉기를 진압하였고 그의 아들 디도는 예루
살렘 함락을 마무리지었다. 예루살렘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그 지역은  군총독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다. 그는 종속국의 주권자들 (dependent principalities)을 지방총독
으로 격하시킴으로써 변방을 튼튼히 했다.
   긴축경제와 새로운 세금의 부과정책으로 인해 국고는 회복되었다. 그는 아직까지도
유적으로서 명성을 가진 원형경기장인 콜롯세움(Colosseum)을 지었다. 그는  A.D.79년
에 죽었으며 디도가 그의 자리를 계승하였다. 그는 그의 아들들인 디도와  도미티안을
포함하는 플라비안(Flavian)왕조의 태조가 되었다.

10. 디도 (Titus A.D.79-81)

   그의 통치기간은 어떤 특별한 일을 성취할 만한 여유가 없을 정도로 아주  짧았다.
이러한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그는 역대 로마의 황제 중에서 가장 많은 인기를  누렸던
황제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가 권장했던 궁중오락의 규모나 그가 베풀었던  개인적
관용은 혹시라도 그가 그의 아버지와 같은 독재자가 되지 않을까 하는 원로원의  우려
를 깨끗이 해결해주었다.
   그의 치세 동안에 베스비어스 화산의 폭발로 인해 나폴리안 연안의 두 도시 폼페이
와 헤르쿨라네움(Herculaneum)이 재해를 당하였다. 디도는 위원회를 소집하여 될 수있
는 한 희생자를 줄이려고 최선을 다했다. 몇 달 후에 로마는 새로운 시청과 판데온(만
신전) 그리고 아그립바 온천장등을 태워버린 대화재로 고통을 받았다. 그는 자기의 개
인 장구까지 팔아서 구제금에 보태었다. 그는 원형극장(amphitheater)을 포함한  새로
운 건물들을 건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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