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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나를 40년 먹으면 무슨 생각이 날까?

redcap 2005. 9. 2. 16:00
만나를 40년 먹으면 무슨 생각이 날까?

출애굽기 16장, 신명기 8장

 

만나는 흔히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인생을 책임지시는 대표적인 상징으로 설명되어진다. 하긴 아무 것도 경작할 수 없는 황무지에서 큰 무리의 집단이 그저 땅에 내리는 만나를 거두어 먹는 것으로 40년을 생존했으니 그 말이 틀린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 만나를 40년씩이나 먹고 나면 무슨 생각이 들까? 어제도 만나, 오늘도 만나, 내일도 만나... 10년 뒤에도 만나, 30년 뒤에도 만나... 바꾸어 생각해보면 어제도 된장국, 오늘도 된장국, 내일도 된장국, 40년 뒤에도 된장국... 뭐 이런 상황이 아니었을까. 그 누가 40년을 변함 없이 된장국만 먹게 되었을 때 하늘이 나를 살렸다고 행복해 할까.

 

실제로 민수기를 보면 사람들은 그 만나로 맷돌에 갈기도 하고 절구에 찧기도 하고 가마에 삶기도 했다고 하니 어떻게든 좀 더 맛있게 먹고 싶어 발버둥치는 사람의 본성을 완전히 거스르지는 못한 것 같다. 실제로 그게 사람 아닌가. 그런데 그저 40년 굶어 죽지 않았다고 해서 인생을 책임졌다고 하기엔 이거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과대광고가 아니겠는가. 차라리 하나님은 광야의 사람들에게 월요일엔 만나를 화요일엔 갈비를 수요일엔 탕수육을 목요일엔 냉면을... 이런 식으로 하셨어야 당신이 인생을 책임진다고 떳떳하게 말씀하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 인생이 '산다'라는 단어가 나온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한다. 사람 살이가 결국 좀 더 맛있게 먹고 좀 더 예쁘게 입고 좀 더 좋은 집에 살며 좀 더 좋은 차를 타는 것이라면 만나는 빛좋은 개살구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의 '살이'가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는 것이다. 태어나면 나이 들고 늙고 죽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나는 결국 사람이 굶어죽지 않을 최소한의 양식이었을 뿐이다. 그걸 40년이 되도록 먹고 나서야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눈을 뜨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굶주렸고 그래서 맘이 고분고분해졌고 그 상황이 되서야 그들 마음에 하나님의 법을 따르는 순종이 있는지 없는지 드러내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제서야 사람의 인생이 먹고 마시고 늙고 병들어 죽어가는 것이 전부가 아닌 그 이후 영원히 사는 것을 포함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광야에 머물며 땅바닥을 뒹구는 양식을 주워먹는 형편도 하나님과 가까이만 할 수 있다면 더욱 귀한 것이라는 것을 인생의 큰 그림을 놓고 볼 때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약속대로 구세대들은 광야에 전부 묻히게 된다. 광야에서 태어나 만나를 먹으며 하나님을 배우며 자란 신세대들에게 성경은 또다시 가르침을 던진다. 좋은 곳에 가게 된다. 배불리 먹게 된다. 그 때 이 시절을 기억하고 잘 해야 한다. 인생의 큰 그림, 변함없이 내리는 만나를 체험한 사람들에게 물질의 풍요로움은 무엇이었을까. 이제 그 쯤 되면 어차피 모든 것이 하늘에서 왔으니 아낌없이 나누어도 좋은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을까. 불행히도 사람들은 또다시 그 사실을 잊고 죄의 본성으로 돌아갔지만 어쨌든 지금도 그 내용은 성령의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삶의 방식이다.

 

하늘의 만나는 하나님이 인생을 책임지신다는 징표인가? 오늘 우리의 학업이, 사업이 매일 내렸던 만나처럼 그저 아무 탈없이 잘 될 것인가? 그저 눈만 뜨면 좋은 성적을, 돈을 바닥에서 만나 긁어 모으듯 얻게 된다는 소리인가? 하하하. 웃기는 소리 말라. 만나는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수준이었고 그건 배고픔을 가르치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었다. 영생을 포함한 인생의 그림 없이는 만나란 여전히 배고프고 야박한 하늘의 장난일 뿐이라는 것을 기억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