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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신학을 읽고
redcap
2005. 8. 24. 16:51
"사도행전 신학"을 읽고
제1장 누가의 두 번째 책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이 동일한 저자에 의해 쓰여졌음에 모두가 동의하면서도 신학적 일치와 마찬가지로 구성상의 일치에 대해서 학자들간에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예를들어 로버트 오툴(Robert O'Toole)은 누가의 신학을 위해서는 두 작품을 함께 읽어야 한다고 믿는다. 즉 첫 번째 책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을 주시는 방법을 설명하고, 두 번째 책은 그리스도인을 참 이스라엘 즉, 이 구원의 수혜자로 세우심을 보여주므로 '하나의 연속되는 작품'으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마이클 피아슨은 두 책의 승천기사를 연구한 후 독립된 작품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장르에 있어서도 오온과 탈버트는 둘 다 '누가-행전'에 대한 장르의 문제를 한데 묶어서 접근하는 반면, 퍼보는 두 책을 장르의 관점에서 볼 때 반드시 같이 살펴보아야만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누가복음을 고대 소설로 여기거나 누가-행전을 고대 소설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온과 탈버트는 이 점이 퍼보의 논지에서 중대한 오류라고 생각할 것이다. 즉 두 권의 책으로 되어 있지만 사실 하나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무시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퍼보의 관점에서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이 함께 포함될 수 있는 장르의 범위를 연구하는 것이 두 책중 하나를 억지로 다른 하나의 책과 같은 형태로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사도행전을 저술하는 데 있어서 누가가 목적하는 바에 대해 수많은 의견제시들이 있어왔다. 이를 정리하면 화합을 위한, 논쟁을 위한, 변증하기 위한, 복음 전도의, 목회적인, 그리고 신학적인 목적을 염두에 두고 글을 썼다는 것이다. 이는 누가가 한 가지 이상의 목적을 염두에 두고 글을 쓴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목적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들을 서로 보충해서 살펴봐야 한다.
사도행전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누가복음과의 관계, 어떤 문학장르에 속하는지의 문제, 무슨 목적으로 쓰여졌는지의 문제에 따라 다양한 견해가 있음을 살펴 볼 수 있었다. 분명한 사실은 사복음서의 저자 중 오직 누가만 복음서의 속편을 썼다는 사실이다. 이 점을 간과해서는 안됨을 보게 되었다. 이는 사도행전을 한 가지 요소만을 가진 책으로 격을 낮추지 않도록 주의해야 함을 뜻한다.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친다면 편협적인 사도행전 해석이 되고 말 것이다. 비록 이 장에서 다양한 학자들의 견해가 논의되고 있어 혼란을 주는 부분이 적지 않지만 그만큼 사고행전의 풍성함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책을 있는 그대로 읽어야만 한다. 이 장에서 말하고 있듯이 "생명체 자체가 그러하듯이 복잡하고도 풍성한, 그리고 다양하고도 신비한 이야기"로 사도행전을 읽어야 할 것이다.
제2장 사도행전의 구성
사도행전의 원본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원본에 가까운 '알렉산드리아 사본'과 편집적인 개정을 거친 것으로 보이는 '서방 사본'이 있다. 두 사본다 중요하다. 서방사본이 학자들에게 중요한 이유는 사도행전이 초대교회에서 어떻게 이해되었는지 말해주고 있고, 각 부분에서 원본에 가까운 독법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가는 풍부한 어휘를 구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문체도 다양하다. 이는 누가가 의식적으로 자신의 역사 서술을 구성함에 있어서 언어 형태를 경우에 맞게 쓰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사도행전의 구조는 크게 오닐이 제안한 지리적인 분석과 문학적인 형태의 주의를 기울인 찰스 탈버트가 택한 본문 내에서 구별되어진 외형을 따르는 방법으로 개괄할 수 있다.
누가는 어디서 어떻게 정보를 얻었는지를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지 않다. 따라서 아람자료, 지역의 자료, 여행일지 등의 자료에서 정보를 얻었을 것으로 학자들은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행전 전체 약 1000구절 중에서 300구절 이상이 다양한 인물들이 행한 설교이다. 사도행전에 있는 연설문들에 대한 여러 의견들이 있으나 누가가 직접 작성한 것이라는 디벨리우스의 견해는 오늘날 다수설로 확고히 자리잡고 있다. 연설문이 누가에 의해서 오늘의 형태로 주어졌고, 그래서 누가의 관심을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 따라서 누가의 신학을 이해하는 재료로서의 가치가 있다.
이 장을 통해 사도행전 자체의 본문을 살피고 사도행전을 특징짓는 문체와 구조상의 특성에 주의를 기울일 수 있었다. 비록 조금이지만 사도행전이 어떻게 나오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엿볼 수 있었다. 저자가 어떤 자료를 활용했는지, 그 자료를 어떻게 사용해서 우리에게 사도행전이 주어졌는지 개괄할 수 있었다. 사도행전을 역사책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문학 책으로 볼 것인지에 따라 사도행전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 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전체적인 느낌은 사도행전이 역사적이면서 문학적이라는 점이다. 이 두 부분을 간과하고 사도행전을 편협적으로 해석하려 한다면 우리는 오류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제3장 사도행전의 신학
사도행전은 "하나님 행전"이라 할 수 있다. 누가가 기록한 모든 것은 신학적 의의를 가짐을 부인할 수 없다.
사도행전은 하나님 중심적이다. 그러나 사도행전에서 누가는 하나님의 성품을 명확하게 묘사한 것은 거의 없다. 누가가 하나님에 대해 믿는 바는 대개 역사 서술 안에 전제되어있으며 그 독특성을 주의 깊게 살펴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누가의 두 가지 개념은 작품 전체에서 핵심적인 문제로 보인다. 한 가지는 하나님께서 역사를 조절하신다는 것이다. 즉 누가에게 하나님은 역사의 주인이시다. 로버트 오툴에 의하면 하나님은 역사를 장악하고 계시며 당신의 계획에 따라 그 역사의 방향을 인도하신다. 그는 누가의 신학적인 주요 주제는 단지 일반적인 역사에 관한 것이 아니라 구원역사에 관한 것이며 이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지금 계속해서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원을 제공하시는지를 보여 주기 위해 누가가 글을 썼다고 주장한다. 또 다른 한 가지는 하나님은 약속을 하시고 그것을 지키신다는 것이다. 누가가 오래 전에 주어진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강조함으로써 입증하기를 원했던 것은 그 예언이나 사건의 정당성이 아니라, 이 둘의 배후에 서 계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이다. 하나님께서 약속을 하시고 또 지키신다는 단순한 사실이 누가에게는 내세울 가치가 있는 요지였던 것이다.
사도행전은 그리스도 중심적이다. 사도행전 안에 발견되는 모든 기독론적인 자료는 누가 자신의 기독론의 증거로 채택될 수 있다. 이 자료 안에 다양성이 더러 있다는 사실은 단지 누가의 사고가 편견이 없고 발전되지 않은 채로 있었다는 증거이다. 모울(C.F.D.Moule)은 사도행전의 기독론은 누가복음의 기독론보다 더 승화되었으며, 사도행전이 보여 주려고 의도한 부활 후의 관점에서 볼 때 논리적인 발전을 나타내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대럴 박은 복음서는 예수를 일관되게 메시야의 모습으로 그리며 시작하지만 점차 메시야 이상이심을 보여 주는 긴장을 끌어들이며, 이런 긴장들은 사도행전에서 해결되는데, 거기서 예수님께서는 메시야일 뿐 아니라 주님이시라고 선언된다고 말하고 있다. 예수님과 구원에 관한 다양한 견해가 있지만 마샬은 사도행전이 예수를 구원을 제공하는 분으로 보여주며, 이 구원은 주로 그분의 고난과 죽으심 때문이 아니라 그분의 부활과 높아지심과 지속적인 주되심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사도행전은 성령중심적이다. 성령은 누구시며 어떤 분이신가? 하는 물음에 다양한 학자들의 견해가 있지만 결론은 누가의 성령 개념이 헬라적인 사고와 구약적인 사고를 넘어서서 그 요소들을 통합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도행전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성령을 하나님과 교회의 인격적인 움직임으로 보려는 경향이다. 오릴리는 사도행전에서 성령의 역할을 제자들에게 힘을 주어서 선지자 같은 말씀의 선포와 이적을 행하게 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 선포는 예수께서 주신 구원을 선언하며 확증한다는 것이다. 즉 오릴리에게 있어서 성령은 백성이 구원받게 하는 책임을 맡으신 분인데 이 구원은 성령께서 행하신 말씀과 이적 선포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벨이라는 학자에게 있어서 성령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교회를 세우는 일을 맡으셨는데 성령께서 주신 담대함과 이적이 성경의 예언과의 연속성을 보여 준다고 말한다. 어떻게 성령을 받는지에 대한 물음에 하워드 마샬은 "성령을 주심은 누가가 궁극적으로 예수께서 주로 높아지심과 연결지은 구원의 한 측면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성령은 예수께서 자신의 주권적인 특권에 따라 주시는 것이다. 사도행전의 이야기들은 예수께서 회개하고 기도하고 믿음을 가지며 세례를 받는 백성들에게 성령을 주심을 말해 준다. 요컨대, 예수께서는 당신께서 선택한 사람 누구에게든지 주실 수 있고 또 주시는 것이다.
이 장에서 사도행전에서 구원 역사와 약속-성취 주제 둘 다를 찾을 수 있음을 보았다. 또한 누가가 다양한 배경에서 자료를 끌어들였음을 알 수 있었다. 사도행전을 단순히 재미있는 이야기로 쓰고 있거나 후예들을 위해서 사실을 기록해 두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해서 우리와 교통하신다는 누가 자신의 독특한 사상을 전개하기 위해서 썼음을 배우면서 사도행전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 있었다. 특히 사도행전을 하나님 중심적, 예수님 중심적, 성령님 중심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을 갖게 된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제4장 사도행전에 있는 교회
누가의 교회론에 관한 견해들은 대개 종말론에 대한 견해들에 의존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는 누가의 종말론에 대한 다른 견해를 가지면 교회관도 달라짐을 말한다. 그러면 다양한 견해를 살펴보자. 한스 콘첼만은 누가가 재림이 무한정 연기되었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이 연기된 종말론 개념이 누가로 하여금 구원역사 개념을 발전시키게 되었다고 콘첼만은 믿은 것이다. 마틸은 누가가 재림이 연기된 것으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임박한 것으로 생각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실제로 교회가 종말을 오게 하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였다. 누가는 열방에 대한 선교를 빨리 완수해서 '예정보다 빨리' 주님의 날이 오게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헬무트 플렌더는 재림보다는 오히려 승천이 누가에게 있어서 더 의미있는 종말론적인 사건이라고 믿었다. 따라서 교회를 역사적으로 기다리는 기간에 두기보다는 오히려 시대의 영광스러운 완성 안에 위치한 교회로서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한스 바르취는 플렌더가 누가복음이 지지한다고 주장하는 바로 그 견해를 반대하기 위해서 누가복음은 쓰여졌다고 주장한다. 미래 지향적인 종말론에 근거한 교회의 역할 개념은 교회의 일차적인 임무가 백성들이 다가오는 심판을 준비하게 하며 이 세상이 상대적으로 덧없음을 선포하고 신실한 자들이 기다리고 있는 궁극적인 구원에 희망을 두게 한다. 어떤 학자들은 누가는 연기될 수도 있는 언젠가 올 종말을 기다리는 이들에게는 경성할 것을, 그리고 교회는 중간기에 수행해야 할 임무가 있음을 그들에게 상기시키고 싶었다고 주장하면서 또한 희망을 잃은 자들, 또는 '종말이 언젠가 오기는 하겠지'라는 식으로 말해서 긴장이 풀린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우기를 원했다고 말한다.
요즘 학자들은 사도행전에 '초기 카톨릭주의'가 있음을 부인하는 추세이다. 콘첼만과 슈미탈즈는 전승을 공적으로 인정하는 사람들로서의 사도직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도적 계승의 증거를 찾지 못했다. 이드워트 슈바이쳐는 사도행전의 지도자직이 필요할 때 생긴 것으로 보인다고 생각했다. 케빈 가일즈는 사도행전에서 사도가 된 제자들이 지도자들이란 자신을 영적인 성직자 계급의 꼭대기에 올려놓는 사람이 아니며, 오히려 지도자는 섬기는 사람이라는 말씀을 들었음을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사도행전의 교회에 대한 이야기는 성장과 성공이란 말로 특징을 정리할 수 있다. 교회가 하는 선교의 계속적인 성공은 그 과정을 말해 주는 많은 요약문에서 강조되어 있다. 제롬 코델은 누가는 하나님의 말씀이 기독교 공동체 안에 심겨진 것으로 보았고 교회의 회원이 새로 늘어날 때는 '하나님의 말씀이 자랐다'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슈일러 브라운은 핍박에도 불구하고 또한 핍박 때문에도 교회가 성장한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제이콥 저벨은 사도행전에 있는 기적들이 승인하는 기능을 한다고 생각하였다. 마찬가지로 오릴리는 사도행전에서 기적이 말씀을 입증해 주고 사도들이 보다 담대히 설교할 수 있게 해주었으며 또한 믿음을 자극하며 교회의 성장을 촉진시켰다고 말한다. 램프는 이적에 관한 누가의 견해가 구약의 견해와 아주 밀접한데, 구약에는 표적과 기사가 심판과 구원을 사람들에게 가져오는 명백한 하나님의 역사이며 동시에 이적들은 선지자들의 희망을 완성시킨 새 시대가 임했음을 보여 주는 증거로 보았다.
사도행전에서 이방인 선교는 교회의 주요 관심사의 하나이다. 쟈크 뒤퐁은 이방인 선교에 대한 누가의 관심은 사도행전의 존재이유라고 생각하였다. 스티픈 윌슨은 사도행전에서 왜, 어떻게 이방인 선교가 시작되었는지를 설명하는 몇 가지 주제를 찾아내었는데 그 요지는 이방인 선교에 대한 근본적인 동기 부여는 단순히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부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격려하심이란 것이다. 누가가 이방인 선교가 시작된다고 보는 문맥은 적어도 세 사지 다른 견해로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즉 이방인 선교가 이스라엘 선교를 대체한다는 견해와 이방인 선교는 이스라엘 선교를 보완한다는 견해, 그리고 이방인 선교가 이스라엘 선교를 완성한다는 견해가 있다.
교회와 국가 간의 조화를 강조하는 경향이 사도행전에서 종종 보인다. 먼저 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법을 지키는 시민으로서 사회 질서를 위협하는 태도를 취하지 않음을 보여 주고 있다고들 한다. 한스 콘첼만은 누가는 기독교를 종교적인 일과 관련된 운동임을, 정치적인 움직임과는 무관함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정치적인 견지에서 볼 때 기독교는 국가와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헨헨과 다른 사람들은 사도행전을 교회의 편에서 로마에 대한 변명을 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 리차드 케시디는 누가가 교회와 국가 간의 조화에 대한 이상적인 개념을 발전시키기를 원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충성과 적절항 증거를 보여 줄 준비를 시키고자 했다는 것이다. 누가는 예수의 제자들이 때때로 인간 통치자 위에 계시는 하나님께 순종해야만 하고 그 결과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음을 독자들이 깨닫기를 원했다는 것이다.
누가-행전에 나타난 공동체적인 삶에 있어서 세례와 떡을 뗌, 그리고 재산공유에 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가일즈와 마샬은 사도행전에서 세례가 믿음이 있음을 겉으로 드러나는 것, 예수를 주로 공적으로 고백하는 것이라는데 동의한다. 세례에 관한 누가의 교리가 애매하다해도 이 사실이 누가가 세례를 중요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누가가 세례받는 일을 자주 보고하고 있는 것은 그것을 기독교적인 경험의 표준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떡을 뗌에 관해서 마샬은 사도행전에서의 묘사는 우리가 기독교 성찬에 대해 갖고 있는 그림과는 아주 다른 그림을 제시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즉 사도행전의 떡을 뗌에 대한 문맥은 기념적이거나 종말론적이지 않지만 존재론적이다라는 것이다. 이는 식사는 하나님을 찬양함 가운데 표현된 교제의 즐거운 축하연이었음을 말한다.
사도행전 앞 부분에 있는 두 구절은 초대 교회가 이른바 '기독교 공산주의'의 형태를 실행했다고 전해 준다. 이에 관해 루크 존슨은 누가가 여기에서 우정에 대한 헬라적인 이상을 반영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또한 이런 묘사는 모든 시대, 모든 장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재산을 어떻게 처분해야 하는지를 가르치기 위해 제시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령께서 하나되게 하신 백성인 교회에 관한 것을 말해주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월터 필그림은 누가는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을 염려하고 필요한 일이 있으면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재산을 기꺼이 나눠주는 공동체를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종말론에 대한 개념을 어떻게 설정하고 있느냐에 따라 교회론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보게 되었다. 학자들의 다양한 견해들을 접하고 나니 과연 나는 누가-행전을 통해 어떤 종말론의 입장에 서서 접근해야할지 심사숙고하게 되었다. 어떤 입장에 서 있느냐에 따라 설교에 엄청난 변화가 있을 수 있음을 보면서 한 사람의 목회자가 얼마나 중요한지 느낄 수 있었다. 성장과 성공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 교회 부흥의 원리를 찾아볼 수 있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마이너스 성장을 보면서 동시에 그것은 말씀의 마이너스 성장임을 볼 수 있었다. 말씀대신 문화가 주도하는 실정에서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이야말로 교회부흥의 정도의 길임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성찬에 관해서도 한국교회가 개혁되어질 분야임을 보게 되었다. 교회에서의 성찬식이 어느새 형식제도화가 되어버렸다. 장례식 분위기를 연출하고마는 성찬식은 분명 개혁되어져야 한다. 성찬식을 통해 언제까지 부활하신 예수님을 장례시킬 것인지 마음이 아프다. 이제 성찬식의 또 다른 모습인 축제가 살아나야 한다. 온 성도가 함께 성찬식을 통해 부활하신 예수님을 기념하여 축하파티를 열어야 하지 않을까?
제5장 사도행전을 역사서로 읽기
사도행전을 역사로 읽는 데에는 중요한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는 누가를 당대의 역사가들과 어떻게 비교할 것인가? 하는 것이요, 둘째는 사도행전이 오늘날 교회 역사를 쓰는데 어떻게 자료로 사용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리차드 퍼보는 사도행전을 역사 소설로 간주한다. 물론 사도행전이 현대적인 의미의 역사서는 아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이 기대하는 바를 근거해서 누가가 역사가로 인정받을 수 있는가를 결정하는 것은 부당할 수 있다. 판 유닉은 누가는 누가 당대의 역사가로서 그에게 기대하는 바를 정확히 해내고 있다고 주장한다. 누가가 그의 시대의 준거 기준 안에서는 유능한 역사가로 인정받았을 거라고 확신했다.
바레트는 누가의 작품이 우리에게 "두 그림이 동시에 비춰진 스크린의 인상을 주는데 초대 교회에 대한 그림과 그 위에 겹쳐진 누가 당대의 그림이다." 라고 말하면서 누가가 이렇게 했다고 해서 불명예스러운 일일 수는 없다고 보았다. 콜린 헤머는 사도행전의 저자가 바울의 동행이었고, 따라서 그가 보도하고 있는 많은 일의 목격자였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개작에서 전승을 구별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더 큰 문제는 누가가 사실을 말하고 있는가의 여부라는 것이다.
사도행전에 있는 자료의 역사적 가치는 다른 자료를 통해 역사적으로 확인될 수 있는 경우와, 다른 자료와 병행되는 것이 없는 경우 그리고 다른 자료와 모순되거나 갈등이 생기는 세 가지 경우를 살펴봄으로 찾아 볼 수 있다.
먼저 다른 자료를 통해 확인되는 경우를 살펴보면 아드리안 쉐르윈화이트는 "지리, 법, 정치 그리고 행정에 관련된 문제들에서 역사성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사실을 찾아냈다. 헤리 태즈러는 로마 관료들 앞에서 재판 받는 바울의 상황에서 법적인 용어, 소송절차 등과 같은 문제가 완벽하게 정확하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고 있다. 게르하르트 크로델은 바울서신이 보여 주는 정보와 일치하는 바울의 일생에 대한 수 많은 세부 사항을 목록으로 내놓았다.
사도행전에서 제시되는 거의 대부분의 정보는 다른 자료를 가지고 확인할 수도, 반박할 수도 없다. 학자들은 역사성에 대해서 이 자료를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대해 많이 일치하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워드 마샬은 "배경을 올바르게 취하는데 주의를 기울이는 저자는 마찬가지로 믿을 만한 이야기를 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사도행전에서 병행 자료가 없는 자료는 세 가지 유형이 있다. 첫째, 누가가 어쩌면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았을 우연히 알게 된 정보를 많이 제공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사도행전에 있는 병행되지 않는 자료는 다른 데서 발견되는 정보와 유사하면서도 더 특별한 정보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셋째 유형은 학자들에게 지나치게 문학적이고 모험적이며 기적적인 그런 비역사적이라고 생각이 들게 하는 기사들이 포함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병행되지 않는 자료를 평가하는 데 있어 고려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사항은 그 자료가 누가 자신의 의도에 기여하는 것으로 보이는가의 문제이다. 만약 그러하다면 그 자료의 역사성은 즉시 의심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사도행전에 있는 자료들 중 어떤 것은 바울서신과 같이 다른 곳에 표현되어 있는 것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제이콥 저벨은 신약 연구에서 바울 서신의 관점에서 사도행전을 평가하고 그 반대로는 판단하지 않는 기본적인 동향에 의의를 제기한다. 사도행전이 없었다면 '알 수 없는 바울'에 대한 희미한 빛을 사도행전은 우리에게 제공한다는 것이다. "바울서신에서 그림자 안에 있는 것을 누가는 태양 안에 두었다." 사도행전에서 바울에 대한 그림은 완전한 것이며 서신서에 있는 것을 가득 채운 것이다. 역사적인 바울을 잘 찾아내는 것은 사도행전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사도행전을 역사책으로 보는 학자들마저도 사도행전이 담고 있는 역사를 평가하는 그들의 방법론적인 접근법이 다름을 보았다. 심지어 사도행전을 신뢰할 수 없으며 서신서를 가지고 검증하고 바로 잡아야 한다는 주장을 보면서 성령의 조명없이 성경을 연구하게 될 때 인간이 가진 짧은 지식을 가지고 성경을 이리저리 칼질하게 될 때 그 해석에 있어서 돌이킬 수 없는 지경까지 갈 수 있음을 보도록 해주었다. 사도행전에서 역사를 찾는 것이지 역사 안에 사도행전을 두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확신할 수 있게 해주었다.
제6장 사도행전을 문학으로 읽기
사도행전은 그 역사적인 증언이 가진 가치와 관계없이 그 책이 명백히 문학적인 장점을 가진 책이다. 문학적인 비평 방법을 가지고 본문을 해석하려는 것은 분명 유익하다. 사도행전 연구에 널리 사용되는 수사학적 비평과 서사 비평에 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수사학적인 비평은 한 문학 작품이 겨냥하고 있는 독자들에게 특별한 효과를 이루어내는 방법을 구별한다. 사도행전에 대해서 수사 비평은 주로 연설문에 적용되었는데 이는 각각의 특별한 상황에서 화자가 사용한 의사 전달 전략을 밝히기 위해서였다. 서사 비평은 이야기를 하는 방법에 특별히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이야기를 해석하려고 시도한다. 서사 비평은 그 관심이 첫 청중에게 작품이 가진 의도된 효과가 있었는가를 결정하는데 있지 않다는 점에서 수사 비평과 다르다. 오히려 그 목표는 그 책이 언제든, 어디서든 있을 미래의 독자- 본문이 견제하고 있는 '가공의' 혹은 '상상의'독자-에 대해 가질 것이라고 가정하는 효과를 확인하는 것이다. 서사 비평은 문학을 해석할 때 세계적이고 신간에 구애됨 없이 보이는 이야기 말하기의 일반적인 관행의 조명 하에서 해석한다. 몇 가지 특징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앨렌 왈워스는 사도행전의 해설자가 무엇보다도 믿을만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는 누가가 자기 작품에 있는 해설자를 이용해서 독자들의 공감을 유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스티븐 쉬일리도 해설자는 이야기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많은 정보를 제공함으로 독자들이 이 역사 서술의 해석을 유도할 뿐 아니라 독자로 하여금 해설자에 대해 의존적인 관계를 갖는 것으로 보았다. 로버트 태너힐은 표현이 해설자의 관점을 나타내는가, 등장 인물의 관점을 나타내는가 하는 것을 의식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사도행전의 독자는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주의를 기울이는 법을 배워야 함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예를들어 사도행전에서 제자들은 복음서에서 보여 주는 과실들이 어떻게 극복되는지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태너힐은 사도행전에서 나오는 반복에 대해서 몇 가지 기능을 한다고 설명한다. 즉 반복은 선택된 자료를 강조하며 독자가 자주 잊어버리는 성향을 막아준다는 것이다. 또한 반복은 설득하는 효과가 있게 하고 독자로 하여금 기대를 갖게 하고 또 그 기대를 새롭게 하도록 도와주며, 이야기를 하나로 묶어주며 암시적인 풍성함이나 이야기에 대한 반향을 더해 준다는 것이다.
문학적인 방법들을 사도행전에 적용할 때 새로운 빛 아래서 이 책을 이해할 수 있음을 보면서 이에 대한 연구가 필요함을 느끼도록 해주었다. 역사적인 해석도, 신학적인 해석도 중요하지만 문학적인 해석 역시 우리에게 더 넓은 성경 해석의 새로운 안목을 길러줄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비록 약술된 설명에 아쉬움이 남기는 하지만 성경을 읽을 때 다양한 각도에서 볼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큰 도움이 되었다. 책 전체에서 다양한 학자들의 견해를 소개해줌으로써 간접적이나마 그들의 사상을 접할 수 있어 유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