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자료

신구약 중간시대2

redcap 2005. 8. 23. 12:55

11. 도미티안(Domitian A.D. 81-96)

   디도는 A.D.81년에 아들이 없이 죽었으므로, 원로원은 황제의 직위를 그의 동생 도
미티안에게 수여했다. 도미티안은 철저한 독재자였다. 그는 급격히 타락하고 있던  로
마인들의 무대의 예술에 제동을 걸었으며 공창(public prostitution)을  제안함으로써
로마사회의 도덕적 수준을 높이려 했다.
   옛 신들의 신전들이 재건축되었고 외래 종교들 특히 개종자들을 얻으려하는 종교들
에 대해서는 억압정책을 썼다. 그는 기독교인들을 박해하였는데 박해를 위한 어떤  정
책이나 구체적 행동의 증거는 별로 남아있지 않다. 그는 자신을 숭배하기를  요구했고
'주와 신' (Dominus et Deus) 으로 찬양받기를 원했다. 경제학자로서의  그는  훌륭한
경영자 였으며 국가의 경제정책은 그의 신하들에 의해 효과적으로 이루어졌다.
   도미티안은 성격이 거친 사람이었으며 라이벌에 대해서는 의혹이 많은 사람이었다.
형 디도의 온화함을 갖지 못한 그는 수많은 정적을 만들었다. 모략이 들어날 경우에는
철저히 복수를 했다. 그의 통치기간의 마지막 해는 원로원에게 마치 악몽과도 같았다.
그들은 스파이들과 제보자들의 테러로 인해 끊임없이 괴롭힘을 당했으며 가족들의  안
전도 보장할 수 없었다. 결국 그들은 자체방어상 황제를 암살하지 않을 수 없었다.

12. 네르바(Nerva A.D. 96-98)

   원로원은 도미티안의 후계자로 네르바를 선출하였다. 그는 나이가 지긋하고 온화한
성격의 소유자로서, 원로원의 입장에서 보면 그는 '안전한' 후보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의 관용정책은 당시 사회 내부에 잠재해 있던 긴장들로 부터의 해방을 가져왔다. 군
부는 도미티안의 암살을 거절했다. 당시 플라비안가는 군부의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
문이었다.
   그러나 네르바는 자기의 후계자로서 군대를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동시에 강력한 권력으로 행정을 펼쳐 나갈 수 있는 트라얀(Trajan)을 세울 만큼  기민
한 사람이었다.

13. 트라얀(Trajan A.D.98-117)

   네르바는 A.D.98년에 죽었다. 그리고 트라얀이 그의 뒤를 이었다. 그는 직업군인으
로서 스페인 태생이었는데 활동적이고 공격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다뉴브강
북방의 다키아(Dacia)를 합병하였고, 아르메니아, 앗시리아, 메소포타미아 등의  정복
으로 인하여 동방지역을 확장해나갔다. 근동에서 발생한 유대인들의 봉기가 A.D.115년
에 진압되었다. 그러나 아프리카, 영국, 그리고 다뉴브변방에서 발생하였던 새로운 봉
기들로 인하여 로마에 돌아오게 되었다. A.D.117년 그는 길리기아의 시청으로  돌아오
는 길에 죽었다.
   이렇게 로마제국이 확장되어가고 있는 배경하에서 기독교는 이름없는 유대교의  한
분파에서 시작되어 급기야는 세계적인 종교로 성장했다. 예수는 아구스도의 치세에 태
어났다(눅2:1). 그의 공생애의 사역과 죽음은 디베료 황제시대에 있었다(3:1). 선교의
위대한 확장시기는 글라우디오 황제(행18:2)와 네로황제 시대였다(25:11, 12). 전승에
의하면 요한계시록은 도미티안의 치세에 씌어졌다고 하며 거기에 언급된 제국의  권세
와 정부의 독재에 대한 언급은 그 당시의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신약성경 내용 중에서 그 당시의 로마세계에서 일어난 바 있는 현행 사건들에 대한
언급이 적은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주로 역사적인 내용을 많이 담고 있는 복
음서들과 사도행전의 주된 관심은 로마보다는 유대교에 있었다. 더우기 신약의 메시지
는 독자들의 외적인 환경보다는 그들의 내면적 삶을 향한 것이었다. 정치적인 것 보다
는 영적인 것. 일시적인 것보다는 영원한 것이 더 강조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
다수의 경우에 있어서 신약성경은 제 1세기의 정치적 상황들과 연관을 가지고  있으며
그 역사적 중요성은 그러한 맥락에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1.  로마제국의 발전 과정을 서술하라.
2.  아구스도 통치기간의 업적을 제시하라.
3.  글라우디오의 종교정책을 설명하라.
4.  네로와 로마의 대화재에 대하여 약술하라.
5.  도미티안의 종교정책을 설명하라.
6.  신약성경이 1세기의 정치적 상황을 자세히 묘사하지 않는 이유는?

제 7 장 유대인

 1. 유대인의 분산
   1) 국가적 분산
    (1) 722 BC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 포로되어감
    (2) 586 BC 남유다는 바벧론에 포로되어감.
    (3) 그 기간동안 많은 유대인들이 예레미아와 함께 애굽으로 피신함.
   2) 애굽에서 유대인 운동
    (1) 알렉산더 대왕이 많은 유대인을 애굽으로 이주시킴
    (2) Antiochus-Epiphanes의 박해시 많은 유대인들이 애굽으로 피신함 (BC20-AD54
        에 애굽에는 약1백만 유대인들이 거주함)
    (3) 애굽으로 부터 북아프리카 해안지역에 유대인들이 흩어져 살다.
   3) Seleucidus 통치하에서 유대인들이 흩어짐
   4) 로마로 유대인들이 이주해감.
    (1) BC63년경 폼페이는 유대인들을 로마로 사로잡아감.
    (2) Julius Caesar 통치하에서 유대인들은 급격히 늘어나 로마에는 유대인 지역이
        형성됨.
    (3) 바울이 죄수로서 로마에 갔을때 로마에는 상당수의 유대인이 있었음(행28:17)
    (4) 많은 유대인들이 로마에서 상업을 경영
   5) 분단이 주는 의미 (          , Dispersion)
    (1) 하르낙인(Harnack)은 그당시 400-500만의 유대인이 국외에 살고 있었다고  추측함.
    (2) 이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로서 복음의 씨앗이 뿌리우기전 묘판을 만드는  것과 같다.
 2. 일상어의 변화
   1) 722BC, 586BC의 포로생활으로 히브리어를 사용하던 유대인들이 아람어를 사용케
되었다. (아람어는 Ura 에서 아브라함이 사용하던 언어임)
    (1) 왕하18:26에 보여준대로 아람어는 전에 유대인들의 공식어로 알려져있었다.
    (2) 포로생활로 부터 귀순한 후 아람어는 유대인들의 일상어가 되었다.
   2)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이후 많은 유대인들은 헬라어를 말할 필요가 있었다.
    (1) LXX은 헬라어를 말하는 유대인을 위한 것이다.
    (2) 예수님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아람어와 헬라어를 공용했다.

 3. 회당
     586BC 포로시대 이후 성전예배는 중단 되었으므로 회당이 생김
   1) 회당은 유대인들이 예배와 교육을 위해 지방 집회장소로 사용되었으며,  주님이
계시던 기간동안 유대인 교육기관으로 가장 중요하게 사용되었다.
   2) 회당은 두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한부분에는 율법서를 담은 법궤가 있고,  그
밑 부분은 예배자들을 위한 곳으로 되어있다.
   회당의 중앙에는 단이 있고, 성경을 읽는 이는 서서 읽고, 가르칠 때는 앉아서  했
다. 좌석은 단을 중심으로 사방에 있되 남여좌석이 구별되어있었다.
   3) 회당의 직원들은 다음과 같다.
    (1) 회당장(ruler of the Synagogue)
      *당회의 사회를 주관
      * 예배를 주관
      * 회원의 제명권을 갖는다.
    (2) 쉘리아크(The Sheliach)
      *예배시 공적인도자가 된다.
      *율법과 기도문을 읽는 책임을 가진다.
    (3) 챠찬(The Chazzan)
      *회당의 관리책임을 가진이다.
    (4) 메들지만(The Methurgeman)
      *성경이 히브리어로 읽혀지므로 통역하는 직(아람어로)
    (5) 바트라님(Batlanim)
      *예배에 참여자중 대표자 10명을 택하여 구제물을 거두는 직분을 맡은자.
   4) 회당의 예배순서
    (1) 기도와 찬송(신6:4-9 참조)으로 시작
    (2) 챠챤이 법괴로 부터  율법책을 가져온다
    (3) 쉘리아크가 일어나 이미 지정해 놓은 성경의 부분을 읽는다
    (4) 메툴지만이 아람어로 통역
    (5) 장로중 한사람이 앉아서 권면의 말씀을 준다.
    (6) 율법책은 다시 돌아가고 기도로 예배를 마친다.
   5) 이같은 회당은 유대인들이 거주하는 동리마다 있었다.
    (1) 예루살렘에도 480여의 회당이 있었다.
    (2) 유대인들이 거주하는 곳에 영향력있는 유대인 지도자 10명이 되지 못할  경우
회당대신 기도처(행16:15)를 세우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