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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4대문명의 발굴과 서구 기독사상 가치체계의 방황 (옮김)

redcap 2007. 1. 29. 13:17
서구의 기독사상과 철학의 혼란과 붕괴는 이렇게
2006/10/23 오후 12:51 | 은시가 쓰는 세계 미술사



4대 문명 의 발굴,


서구 기독사상 가치체계의


종말과 방황.


(4대 문명 중 두 문명이 일어난 중동지역)



19세기부터 이루어진 4대 문명지의 발굴


거의 9천년 전인 BC 7,000년부터 꽃을 피운 이집트의 나일 문명과 이웃한 중동 지역의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인도의 인더스 문명, 그리고 중국의 고대 문명이 인류에게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은 거의 이제 겨우 1세기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19세기부터 조금씩 드러나 역사가 시간의 경과에 따라 일방적으로 진보를 했다고 생각하는
역사적  진보주의자와 그리고 서구의 문명이 제일인줄 알고 있었던 서구인들의 긍지와 자부
심에 아주 큰 상처를 주게 되었다.

그렇게 발달된 문명이 야만의 땅과 비문명지라고 믿고 있었던 지역에 거의 9천년 전에서부
터 5천년 전까지 존재했었다고 그들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19세기의 서구의 혼란과 정신
적 황폐화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동안 단단하게 중심사상으로 유지되었던 이들의 기독 사상과 철학 체계도 중심을 잃고
붕괴되기 시작했다. 서구의 단단한 기독교회가 이때부터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기존 도덕
성의 체계와 신앙체계가 무너져 내렸다.

 18세기부터 시작된 열강들의 식민주의 경쟁에서 노예무역등과 기존의 방식에 대해서 서구인
들은 신념을 점점 잃어가고 있는 그 때에 새로운 식민지에서 고대 문명들이 속속 발굴되기 시
작한 것이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본격적으로 드러난 것도 이 때부터였다. 19세기로 접어들면서 그들의
설형문자가 해독되기 시작되고 유적(遺蹟)들이 고고학적 발굴이 개시되었다. 독일의 G.F.
그로테펜트(1775∼1853)와 영국의 H.C.롤린슨(1810∼1895) 등의 노력으로 페르시아어(語)
가 먼저 해독되었다.

1842년 프랑스인 P.E.보타가 아시리아의 수도였던 니네베를 발굴하여 약 2만의 책자로 된
고문서를 발견함으로써 아시리아를 연구하는 아시리학의 탄생을 보게 하였다. 다시 1847년에
는 베히스툰의 암석 절벽면에 3개국어로 씌어진 다리우스 대왕의 전승기념비문(戰勝記念碑文
)에 대한 해독(1847)이 영국의 롤린슨에 의해 이루어졌다.

 
메소포타미아 인근 지역의 설형문자, 엘람어 ·바빌로니아어 ·수메르어 등이 연이어 해독되
고, 한편 고고학적 발굴도 A.H.레야드, V.프라스, H.러섬 등에 의하여 니네베 ·코르사바드
·아슈르 ·바빌론 ·님루드 등 여러 지역에서 진행되었고 여기서 발견된 출토품들은 각각
대영박물관과 프랑스의 루브르미술관으로 옮겨졌다.

19세기 말에는 독일과 프랑스의 조사대도 본격적으로 메소포타미아 유적 발굴에 참가하게
되었고 조사의 대상지도 전 지역으로 확대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때까지는 바빌론 ·우루크
·라가슈 ·니푸르 등지가 발굴 조사되었다.
다시 1920∼1930년대에는 우르 ·알우바이드 ·키슈 ·우루크와디얄라강 유역의 카파제 ·텔아스
마르 및 유프라테스강 중류의 마리 등을 조사했다.


그리고 이들은 수메르 이전의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화 해명을 위하여 아시리아 지방에 대한
관심을 재차 가지게 되어, 텔할라프 ·테베가우라 ·니네베 등이 발굴을 시작하였다.히틀러도
본격적으로 발굴단을 파견했다.

이라크 정부에서도 1940년대 이후 에리두 ·하수나 ·텔 우카이르 등을 발굴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후는 우루크 ·니무르 ·님루드 등의 계속적인 발굴조사를 진행했다.


사진과 그림 설명 1,2/ 우르(Ur)의 지구랏트, 이라크, BC 2100년경에 건축되었다.
그림은 아래의 사진을 구체적으로 재현한 모습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사진과 그림 설명 3,4/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지구랏트(Ziggurat), 흰 신전, 우루크, BC 3500-3000년에 건축
하늘의 신인 아누(Anu)에게 봉헌







사진과 그림 설명 5,6,/ 신바빌로니아 건축 (바빌론 지역)
유프라테스강이 도시의 중앙을 가로지르고 여섯 개의 다리가 게이트와 함께 위치하는 계획도시.





이슈타르문(Ishtar Gate). 4~5층 높이의 민가 건물들이 도시를 채우고 있었음 (현재 이락, 시리아, 이집트 등지의 토속건축물에서 보게 되는 중정을 향해 밀집된 목재 프레임이나 벽돌 볼트 위에 진흙을 이용해 만든 주거형태)
 
바빌론의 이슈타르문(Ishtar Gate), BC 575년경 
 





대영제국, 루브르 박물관 등이 서구인에게 미친 영향과 자각


발굴 후 옮겨진 유물들은 그들의 박물관,  베를린, 루브르 그리고 대영제국의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그런데  이 유물, 메소포타미아 지역과 나일강의 이집트 유물들이 옮겨지고 난
이후에 어떤 사회적인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는가?

이전까지 대다수의 유럽인들은 문명과 문화란 오직 자신들의 것이고 자신들의 기독사상
중심으로 엮어온 사상과 문화가 전부인줄만 알고 있었다. 그러다 풍문으로만 떠돌던 서역과
동양, 그리고 먼 동쪽(중국과 일본)에 자기네들보다 더 우월한 문명이 훨씬 이전에 존재한 것
을 일반인들이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루브르와 대영제국, 그리고 베를린의 박물관은 전문가들만 알고 있었던 고고학 지식과 타
문명에 대한 지식을 일반화시켰다.


이렇게 문명에 대한 일반 대중들의 발견과 자각은 서구의 기존 모랄의 몰락과 단단한 정신
세계의 붕괴를 촉진시켰다. 20세기의 인류의 야만과 광기의 역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와중에 세계 1차 대전이 일어나고 다시 후에 독일을 집권한 히틀러의 야만과 광기의 역사가
시작된다.  서양의 가치체계의 혼란과 붕괴는 어떨수 없는 것이었다.

 

해체와 파괴의 미학 다다이즘이 나타난 것도 이런 연유에 의한 것이다. 이런 서구의 혼란은
2차 세계 대전 후로도 계속되고 서구의 교회는 완전히 와해되기 시작했다. 철학과 문화가 길
을 잃고 전자는 이제 거시적인 접근방법을 잃어버리고 미시적인 접근 방법이 나타나기 시작
하고 문화는 파괴와 해체 그리고 혼성모방과 짜집기라는 모색과정으로 들어간다.

결국 이들은 활발한 식민지 지역 문화의 연구로 막대한 그들 문화재를 가져다 자국의 박물관
에 유치를 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렇게 가져간 유물들은 결과적으로 자국의 시민들에게
새로운 자각을 심어주게 되었다.

'아 그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네.'하는 놀라움과 그들의 자국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파괴시
키기 시작하고 의심없이 믿고 의지했던 기독 사상에 점점 의심과 회의를 가지게 해 오늘날
포스트 모던 후기 현상을 가져오게 될 수 밖에 없었다.

큰 줄기의 거시적인 안목의 눈을 잃어버리자 궁여지책으로 이들은 현상학적 접근과 언어의
표피적인 접근 그리고 심볼을 통한 상징주의적 접근과 구조주의 접근으로 세계를 재 해석할
수 있는 방안으로 들고 나와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구조주의, 현상학등 현대 철학을 세우고 세상을 들여다 다시 보고 재해석하려고 시
도했지만 여전히 이들은 방황하고 있는 중이다.  다시 한번 미술사의 입장에서 정리해 보자.

서구 미술사의 혼란과 방황은 그들 철학과 사상, 기독 사상의 붕괴외 혼란으로 비롯된 것이
다. 그리고 그들의 그 혼란은 19세기 세계 문명의 발견으로 비롯해 자각된 현상으로 이루어
진 것이었다.

그런데 한국은 지금 어떤가?



사진과 그림설명 7,8,9/
메소포타미아에서 발굴된 바빌론의 공중 공원도 이집트의 피라밋처럼 서구인에게 충격을
주었다.  이 공중 공원은 세계의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상상도와 남아있는
구조물 그리고 측면도.
















<은시의 글/ 미술사를 보는 눈2>

출처 : 달마선
글쓴이 : 박건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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